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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관계이론(8)] 대상관계이론에서 '분화'

느루독서심리연구센터(010-2788-3025) 2019. 8. 28.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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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로 돌아가서, 그것은 '형체가 없고 비어 있는' 땅에서 시작한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은 형체가 없고, 어둡고 수분으로 된 이런 덩어리에 만족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하나를 다른 것과 나누고, 전체에서 각각에 어떤 공간을 부여하는 과정을 시작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리고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리고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창세기 1장 3절 - 4절

하나님은 또한 심연의 물에서 창공의 물을 분리시키고, 바다에서 육지를, 밤에서 낮을 분리시켰다. 각각은 거대한 빛을 동반했다. 그는 창조물들을 만들었는데, 이들이 각자의 종을 번식시켰다.

 

우리의 태초에 이런 유대기독교의 이야기는 무정형의 모체에서의 분화와 연관이 있다. 처음에 빛과 어둠, 습함과 건조함의 분리가 있었다. 통합 또한 물이 합쳐지는 것과 각각의 충조물이 종을 재생산하는 것으로 제시된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도 거의 똑같은 진화가 일어난다. Bulfinch의 첫 몇 구절은 Ovid의 이야기에서 따온 것인데, 이는 1세기에 흑해의 토미(Tomi)에 그의 추방되어 있는 동안 쓴 것이다. Ovid의 작품은 로마가 초기 그리스 신화를 전적으로 발아들엿음을 보여 주는데, 삶의 주요 특성인 변신이나 변형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Ovid의 설화는 이렇게 시작된다.

 

끝없는 다툼만이 계속 되었다: 하나의 모양 안에

열기는 냉기와 다투고, 습기는 건기와 싸웠으며,

딱딱함은 부드러움과 다투고, 무게를 가진 것은

무게를 갖지 못한 것과 시비를 가렸다.

신이었든가, 신보다 더 친절한 자연이었든가?

모든 시비를 가려, 하늘과 지구를 가르고,

물을 땅과 떼어놓았으며,

공기는 성층권과 떨어지게 하고, 해방

이렇게 만둘이 진화했고, 앞이 보이지 않는 혼돈으로부터 각자의 자리를 찾았고...

-변신, Humphries, 1955

초기 분화에 대한 이런 묘사는 창세기에 시사되어 있는 하나님의 창조적 충동을 넘어서는 동기를 포함한다. 무정형의 덩어리는 잠재적으로 파괴의 씨앗, 즉 대적하는 상반되는 요소를 포함한다. 기원에 대한 이런 신화적 이야기는 Klein의 죽음 본능 개념과 유사하다. 그녀의 관점에서는 모든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유아는 자기 소멸로 향하는 타고난 경향성을 가진다. 이런 선천적인 자기 파괴성은 유아의 생멸을 보존하기 위해 분열되어 외부로 투사되어야 한다. 이런 개념화에 따르면 최초의 심리적 분화는 내면의 공격성을 다룰 필요성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이는 그리스,로마 신화가 내부에서 대적하는 요소를 갈라놓기 위해 당이 나누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시사하는 것과 유사하다.

 

대부분의 미국 대상관계이론가와 같이 Kernberg는 죽음 본능의 개념이 유용하다고 보지 않는다. 그는 초기 분열이 일어나는 원인은 공생기 유아가 아직 유쾌한 정서와 불쾌한 정서를 통합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시사했다. 이후에야 어머니에게서 분화되는 동안 유아는 원하는 것이 원치 않는 것에 압도되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 적극적이고 방어적으로 좋고 나쁜 자기이미지와 대상이미지를 분열시킨다. 분화가 있기 전 분열은 경험을 통합하지 못하는 수동적인 무능력이다.

 

유대기독교, 그리스,로마의 우주창조설은 양극의 상반되는 요소로 나누어져야 하는 미분화된 덩어리에서 시작된다는 점에서 대상관계 이론과 흥미로운 유사점이 있다. 유대기독교 이야기는 창조적 충동이 분화를 가져왔다는 것을 나타내고, 그리스.로마 신화는 경격성을 조절할 필요성이 이런 분리를 초래했다고 제안한다. 분화의 결정요인이 성장욕구인지 아니면 갈등적인 본능적 충동을 조절하고자 하는 욕구인지에 대한 주된 이론적인 논쟁은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다. 이런 차이는 kernberg와 Kohut의 논쟁에 반영되어 있고, 이뿐만 아니라 욕동이론이 대상관계이론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많은 다른 논쟁에 반영되어 있다.

 

최초의 발달에 대한 수많은 다른 유사한 이야기가 서구의 전통과 다른 지역의 전통에서 존재한다. 아담과 이브 이야기의 성적 함의에 대해서는 잘 기술되어 왔다. 이 이야기는 좀 더 유아적인 주제의 관점에서 논의해 볼 수 있다. 추방을 불러온 것은 탐욕, 즉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에서 열매를 따먹은 행위였다. 낙원이 제공하는 것 이상, 하나님이 주시기로 선택한 것 이상을 얻고자 하는 시도로, 아담과 이브는 그들의 분리와 해부학적 차이에 대한 지식을 얻었고, 낙원과 같은 그들의 공생적 실존을 상실했다. 대상관계적 관점에서 보면, 유아의 배고픔과 그리고 어머니가 가진 것을 얻고 어머니의 좋은 양육적인 자질을 삼켜 자기 것으로 갖고자하는 유아의 소망은, 대상 상실과 취약성에 대한 느낌을 초래한다. 만약 유아가 탐욕적으로 젖가슴의 본질을 삼키기를 바라고, 그저 주어지는 젖만 받으려 하지 않는다면, 그는 갑자기 자기가 혼자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만약 유아가 좋은 것을 담고 있는 것으로부터 훔쳐 그것의 호의를 잃어버리면, 누가 그를 돌볼 것인가? 이와 비슷하게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의 가장 내밀한 비밀, 즉 선과 악에 대한 그의 지식, 주거나 주지 않고 갖고 있을 수 있는 그의 능력을 갖기를 바랐다. 그들의 과욕이 그들의 단독성에 대한 자각을 가져왔다.

 

나는 에덴의 정원 이야기와 관련된 또 다른 비유에 대해 추정해 보고자 한다. 애초에 아이는 공생적 합일체 속에 있다. 마치 신의 존재 안에 있는 것처럼 모든 욕구가 채워지고 유아는 자신이 분리된 존재임을 자각조차 하지 못한다. 자아기능이 발달하면서 유아는 곧 좌절과 만족, 좋은 것과 나쁜 것, 자기와 타인을 구별하기 시작한다. 이런 지식은 공생적 합일체의 상실을 가져온다. 전능감을 갖기를 소망하면서 유아는 좋은 것과 나쁜 것, 모든 것의 제공자인 부모로부터의 분리에 대한 지식을 자신이 훔쳤다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사실은 그것은 발달과정에서 그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아마도 태초에 대한 성경의 이야기가 여전히 의미 있는 이유는 공생의 상실, 우리 모두가 경험한 상실에 수반하는 좋은 것과 나쁜 것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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